그놈의 자존심!
어젯밤 남편과 함께 유튜브에 올라와 있는 '조정래' 원작 《태백산맥》이라는 영화를 보았다. '임권택' 감독이 만들고 배우 '안성기'가 주연을 맡은 1994년작 영화이다.
원래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이 10권이 넘는 방대한 분량이라 그렇게 긴 내용을 2시간짜리 영화에 다 담아내기에는 무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과 내가 몰두해서 볼만큼 재미있었다. 일제 강점기를 갓 넘긴 1945년 10월부터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의 여수 순천 '벌교'라는 마을에서 있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내용이다.
여순 반란 사건, 빨치산, 친일지주들의 횡포, 처참한 소작인들의 절망, 그리고 이념의 대립으로 짓밟히는 당시 한반도 상황을 잘 그려놓았다.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무론하고 어떤 인간에게나 들어가 있는 죄의 본성과 무지 앞에 그것을 이길 수 있는 완벽한 이념이나 체제는 없다는 사실을 웅변하는 것 같았다.
자정이 다 되어서야 영화가 끝났고 늦은 시각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양쪽 어깨 통증에 무릎 관절도 시큰거리고 목 관절도 편치 않고, 춥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돌아누워도 편치 않고, 낮에 문집사님과 통화한 내용도 생각나고....... 결국 새벽 4시를 넘기고 그 이후에 겨우 잠이 들어 오전 늦도록 일어나지 못했다.
점심 무렵이 다 되어서야 아베샤네다(의류 도매상가 밀집 지역)에 나갔다. 조카네 가게에 들러서 창고에 쌓아둔 내 물건들 상태를 확인하고 간단히 정리한 뒤 매장으로 내려왔다. 계리사가 조카에게 맡겨둔 간이 영수증을 찾고, 어느 장로님 댁에 방문한 남편을 기다리느라 잠시 조카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느껴진 것은 조카가 나를 좀 딱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아는 젊은 부인은 나와 같은 업종인데 지금 같은 때에도 온라인으로 제법 매출을 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에 비해 나는 아무것도 못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숙모네를 걱정하는 조카 마음은 이해하지만 의기소침해져서 가게를 나와 남편을 만났다.
조카와 있었던 일을 얘기했더니 남편은 그런 나를 위로하려 애썼다. 이때까지만 해도 좋았다. 집에 돌아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남편에게 또 푸념을 했다. 솔직히 나는 장사라는 직업이 싫다고. 그랬더니 남편이 이런다.
"당신은 교직도 힘들다면서 하기 싫다 하고 장사도 싫다 하니 그러고 보면 당신은 곱게 집에만 있어야 하는 사람이다."라는 것이다.
남편은 내게 일을 하게 하는 것이 미안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나에게는 비난하는 말로 들렸다. 거기다가 또 한 마디 덧붙인다.
"몇 년 전에 한국으로 철수하자고 했을 때 그 때 갔으면 좋았잖아."
몇 년 전 남편은 아무런 대책도 없이 한국으로 돌아가자고 했었고 나는 반대했었다. 반대한 이유는 당시 아이들이 고등학생이어서 그때 돌아가는 것은 이이들의 진로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부모로서 무책임한 결정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게다가 남편과 내가 한국에 가서 어중간한 나이에 아무런 기술도 자본도 없이 무얼 한다는 것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비록 갈레리아에서 장사를 해도 한국 사회만큼 편견이 심하지 않다. 자비량 선교사가 생활비를 벌기 위해서 장사를 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한국으로 돌아가면 더 이상 선교사도 아니고, 직업과 재산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고 대접이 달라질 텐데 나는 견디지 못할 것이다. 젊은 시절 한국에서 내가 교직에 있었어도 내가 가진 부로써 남들과 비교당하는 것이 싫었다. 비교 상대적으로 초라해 보이는 내 삶의 모습과 선교회에서의 사역 부담까지, 그 모든 것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어쩌면 나는 이 아르헨티나로 도망 온 건지도 모른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이 싫어서 도망한 것처럼.
어제 가정 예배 때 설교 말씀을 들으면서 마음 깊이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누가복음 16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불의한 청지기를 오히려 칭찬한 한 부자의 비유이다.
이 비유는 의로우신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정죄 당하고 무시당하는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비워짐과 사랑을 나타내는 말씀이라고 하셨다. 아무리 여러 번 읽고 또 읽어도 참 깨닫기 어려운 말씀이었는데 이렇게 깊은 은혜가 숨겨져 있었다니 놀랍고 감사했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깊은 것을 보게 하소서!" 이 기도로 항상 기도해야 한다.
그런데 말씀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는 대조적으로 형편 없는 내 모습을 보게 되었다. '나'라는 인간은 이 비유 속의 세리와 죄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 더 악랄한 바리새인이기도 하다. 나는 남들에게 조롱당하고 고소당하고 참소당하고 죽임 당하기는커녕 누군가 조금이라도 내 자존심을 건들면 불같이 화가 난다. 자존심이 뭐기에 티끌만큼의 생채기가 나는 것도 참을 수가 없는지, 죽기보다 싫어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높임 받고 존경받기 원한다. 추앙받고 칭찬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모두가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나를 따르고 나를 좋아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군림하기 좋아하는 마귀의 속성이다.
이 죄의 본성 때문에 나는 주님의 순종하심과 낮아지심을 흉내조차 낼 수 없다.
지난 주인가? 중고장터에 의료 용구인 팔지지대를 판 적이 있다. 새 제품인 경우 온라인 판매가가 350~400페소 정도여서 200 페소에 내놓았다. 그리고 내 기억으로는 사용한 적이 없고 상자채 보관만 해 둔 것이라 '새것'이라고 광고를 했었다. 작은 아들이 축구하다 다쳤을 때 약국에서 구입해 놓고 맞지 않아서 더 튼튼한 것을 사서 사용하고 그것은 케이스채로 놔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사 가지고 간 아주머니가 그 다음날 항의하는 문자를 보내왔다. 물건이 찢겨 있었다면서, 어떻게 새것 아닌 것을 새것이라고 속여 파느냐, 양심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 하는 내용이었다. 순간 피가 거꾸로 치솟는 것 같았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이만한 일에 내 양심 운운하는 것에 화가 났다. 환불해 줄 테니 당장 가져오라 했더니 자기가 물건 사기 위해 격리 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왕복 5km를 소변도 참아가며 걸었는데 다시 그러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 내가 그쪽으로 갈 테니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하는 말이,
"내가 고작 200페소 환불 받겠다고 이러는 거 아니요. 당신 양심이 괘씸해서 한 마디 하는 거요." 했다.
더 이상의 언쟁이 무의미 했으므로 미안하다 사과하고 마무리 지었지만 정말 커피 한 잔 값에 내 인격이 모욕을 당했다는 것이 분했다. 내가 이런 걸 얼마나 치가 떨리도록 싫어하는지 다시 한번 경험한 사건이다.
고소 당하고 조롱당하는 죄인의 자리에까지 낮아지신 주님의 낮아지심은 도대체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주님은 억울하게 희생당하는 의인의 모습으로 명예롭게 죽으신 게 아니다. 죄수로서 인간들에게 고소당하고 재판받으셨다. 조롱과 침 뱉음을 당하셨고, 돌을 던지며 죽어라고 악을 쓰는 군중들과 로마군에 의해 처형당했다.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이!
12년 전 사건이 떠오른다. 그 때도 나는 내 이름이 사람들 입에 불명예스럽게 오르내린다는 그것 하나로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 일로 몸져눕기까지 했다. 너무나 억울하고 복잡한 일이라서 그것을 이야기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지금은 돌이켜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라 자세한 언급은 그만두련다.
낮은 자리로 내려간다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자리로 내려가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천인 공로할 죄인으로 취급받는 자리까지 가는 것이다. 죄인들의 더러운 발에 짓밟혀 죽는 징그러운 벌레가 되는 것이다.
나뿐 아니라 우리 인간들 중에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일이다.
솔직히 나에게 '낮아짐, 업신여김을 당함'이라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싫어하는 일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나를 그리로 끌어가신다면 끌려갈 수밖에 없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삶이요 죽음이다. 내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하나님은 항상 이기신다.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완전하게 설 것이기 때문이다.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 창녀의 자리로 내려간 것 같은 주님의 순종이 내 순종이 된다.
순종하기 싫어서 한국에서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왔어도 여기서 다시 내게 정해주신 분량만큼 겪게 하신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 (잠언 19장 21절)
2020년 6월 29일 월요일 맑은 후 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