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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글쓰기

정말 주는 삶을 원해?

by 거북이(hangbokhan gobooki) 2020. 7. 15.

 봄비 내리는 주말 오전, 갈레리아 문을 열고 커피를 마시고 있다. 옆 가게 아저씨가 '보나피데(Bonafide)'에서 나온 미니 초콜릿 케이크를 가져다주었다.

 

 커피 마시는 시간에 딱, 때맞춰 생긴 달콤한 초콜릿 케이크를 먹으면서 새삼 깨달아지는 것이 있다. 계속 받기만 해 온 내 삶의 모습이었다. 지금 내 몸에 사용 중인 물건들을 돌아본다. 조카가 쓰던 뿔테 안경, 조카가 준 티셔츠와 레깅스, 지인이 준 운동화, 시누님이 주신 양말, 점프까지 모두 다 스스로 마련한 것이 없다는 것이 놀랍다. 의복뿐 아니라 집안의 가재도구도 그렇다. 침대, 에어컨, 냉장고, 세탁기 등 모두 이러저러한 사연이 있고 선물로 내게로 온 것이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런 삶의 모습이 싫었다. 지금은 조금 익숙해졌지만 아직도 너무 맘 불편하고 심지어 괴롭다. 주는 것이 기쁘고 마음 편하지 누가 계속 받기만 원할까? 원했던 삶이 아닌데 이렇게 되었다. 이젠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하심과 인도하심이라 믿는다. 웬만한 것은 스스로 해야 직성이 풀리고 뭐든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자신감과 지나친 독립심을 꺾어 놓으시고 은혜로 살아가야 함을 가르치시는 것 아닌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신 말씀을 떠올린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려 주시고 나는 일방적으로 받기만 한다. 복되신 하나님,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진노에서 건져내어 하나님 사랑 안에 거하며, 이것이 가능하게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비우심과 낮아지심을 본다. 내 코에 숨을 주신 아버지 하나님 앞에 내 것이라 내세울 것이 없다. 사실 그렇다.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주님 것이다. 나 자신도 주님이 지으셨으니 내가 무엇을 드릴 수 있겠는가? 나는 없는 것이다. '無' 이것이 영생이다. 나는 애초에 뭔가를 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지금 나는 변명을 하고 있는 듯하다. 베풀지 못하고 받기만 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궁색한 변명이다. 내가 쓰지 않는 것, 쓰고 남은 것으로 주려고 했기 때문에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내가 쓰는 것을 포기하고 내게 필요하고 요긴한 것을 다른 사람에게 선사해야 진정으로 주는 삶의 행복을 맛볼 것이다.

 하나님 주신 것을 내가 감사한 마음으로 써도 되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는, 그 황홀한 삶을 누리게 되기를 기도한다. 

 

            2018년 10월 어느 토요일

 

                                       ###아르헨티나 카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커피. 이것은 거품이 부드러운 '카푸치노'이다.                                                  커피에는 항상 생수가 따라옴. 입안을 헹구어 제대로 커피맛을 음미하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