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저녁 식사 후 남편과 함께 '신박한 정리'라는TV 예능 프로그램을 봤다. 정리가 심각하게 필요한 사람 의뢰를 받고 가서 그 집의 살림을 정리해 주는 프로그램인데 나야 그전부터 이런 부분에 관심이 많았다지만 남편이 이런 것에 흥미를 느끼는 것이 의외였다. 시청을 끝내고 따끈따끈하게 동기부여를 받아 의기투합하여 우리 집 정리를 시작했다.
안방의 커다란 3단 서랍장을 정리하는 것이 목표였다. 이 서랍장 둘째 칸을 차지하고 있던 자질구레한 문구류와 소품들을 정리하니 큰 수납공간이 생겼다. 그곳에 옷장 위 선반에 묵혀두었던 수건, 식탁보, 베갯잇 등을 넣었다. 일단 그렇게 넣긴 했는데 그것도 조만간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 같았다. 쓰지 않아 오래되고 색이 바랜 물건들이었다. 진작에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것을 이렇게 묵혀두었구나 싶었다. 손 닿지 않는 곳에 두고 열어보지 않는 물건들은 결국은 이렇게 되는 것 같다.
그 정도로 하고 자정쯤 잠자리에 들었는데 전날 밤처럼 역시나 잠이 오지 않았다. 기분 좋게 잠들 듯하다가 잠들지 못하기를 수십 번은 반복한 것 같다. 잠드는 것조차 내 힘으로 되지 않으니 환장할 노릇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꼴깍 잠 속으로 떨어져 무려 10시간을 죽은 듯 자다가 깨어났다.
지난 밤 잠들기 전 생각한 것 중 하나는 마태복음 6장 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하신 말씀이다. 주님은 나의 영육 간의 필요를 나보다 더 잘 아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나라와 주님 주시는 '의'이다. 먹고살기 위해서나 이 세상의 재물과 권력을 얻기 위해 분투하는 것이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는 것이다.
지난 수년 간 내가, 한 때는 고용인으로 한 때는 자영업자로 아베샤네다(부에노스아이레스 시에 위치한 의류 도매 상가)에 출퇴근하면서 얻은 것이 무엇인가? 그건 세상의 치열함을 경험했다는 것이고 세상이 얼마나 무섭고 각박한 노예선 같은 곳인지 똑똑히 보았다는 것이다.
조카네 가게 일을 돕는 것으로 시작한 아베샤네다에서의 일은 생계를 위해서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지만 하나님의 뜻 가운데 이루어진 나에게는 용광로 같은 훈련장소였다.
"세상은 너무 악하고 더러운 곳이더라!"가 아니라 "그곳에서 보니 나도 똑같이 더러운 인간이더라.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더라." 하는 것이었다.
장사를 해보니 매시간마다 손에 '돈'이라는 것이 들어왔고, 몸서리치도록 장사가 싫으면서도 손 끝에 만져지는 돈의 짜릿함을 즐기게 되었다. 시간과 온 마음을 거기에 다 쏟아부었다. 새벽부터 저녁까지 발이 부르트고 어깨가 무너지도록 일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쓰는 방법이라면 그것이 불법일지라도 '필요악'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하고 타협했다.
단지 다른 사람(조카)의 사업장 고용인으로 있었을 때에는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는데 해마다 심해지는 불경기로 조카네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을 때는 사태가 심각해졌다. 그것이 2019년 바로 작년이었다. 당장 생계 수단을 마련해야 했는데 하필 남편은 한국 방문 중이었다. 나는 교만하고 믿음이 없었다. 남편이 돌아오기 전이라도 늦기 전에! 당장! 나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의류 사업이므로 곧바로 의류 도매상 밀집 지역을 날마다 순회하며 시장조사를 했다. 장사가 가장 안 되는 2월에도 매장이 상인들로 붐비는 몇 곳을 눈여겨보았다. 10대, 20대 여자들이 입는 '탑(top)'을 만들어 파는 곳이었다. 탑은 어리거나 젊은 여자 아이들의 파티 옷 또는 춤장 옷이다. 고등학교 졸업여행, 15살 파티(15 años fiesta), 각종 행사, 춤장출입 등에 바로 이 탑을 입기 때문에 수요는 항상 넘치는 것 같았다. 그 외에도 탑이라는 품목의 유리한 점은 크기가 아주 작아서 원단이 적게 들어가는데도 가격을 높게 책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파티장이나 춤장에서는 한 번 입었던 옷을 다시 입는 일이 없고 그 나이의 여자들은 옷이 맘에 들기만 하면 가격 따지지 않고 구매한다. 한마디로 수익성이 뛰어난 품목이었다.
남은 문제는 이 품목을 취급하는 것이 성도에게 합당한가 하는 문제였다. 하지만 그 당시 나에게 도덕적 기준은 차후의 문제였다. 남들에게 욕 먹지 않을 정도이면 그만이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실까 하는 것은 일부러 생각을 회피했던 것 같다. '그리스도인은 뭘 해도 자유잖아'라고 합리화했었다.
그렇게 품목을 정한 후에, 목이 좋은 점포를 물색하고, 월세를 협상하고, 계약하고, 거래처를 알아보고, 물건 확보를 위해 조카한테 얼마간의 사업자금을 빌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다.
이렇게 장사를 시작했지만 순탄하게 매출이 오르지는 않았다. 아르헨티나 최대 도매상 밀집지역이라는 지역 특성상 높은 월세를 내야하고 거기에 더하여 소득세, 영업세, 관리비, 계리비 그리고 우리 가정의 생활비까지 수익이 창출되려면 최소한의 매출이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지 계산이 나왔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지역에서 공공연히 거의 모두가 저지르는 불법 중 하나는 탈세이다. 도매상가이기 때문에 주로 소매상인들을 대상으로 판매를 하는데 그들이 영수증을 요구할 때 구매금액의 25~50% 정도의 영수증을 끊어준다. 그들도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업자들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상인들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아르헨티나는 세율이 지나치게 높다. 세금을 100% 내고서는 사업을 할 수가 없다."
소득세, 영업세 외에도 종업원을 고용하면 고용세라는 것을 내는데 월급만큼의 고용세를 고용주가 부담해야 한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청에 신고하지 않은 채 종업원을 쓰는 경우도 많다. 물론 불법이다. 그래서 이러저러한 이유로 노동분쟁이 잦다. 종업원들이 고용주를 고발하는 것이다. 매장이나 창고의 물건을 빼돌리는 종업원들도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로 상대방의 피를 빨아먹으려는 좀비들 같다.(물론 그렇지 않은 사업장도 있을 것이다.)
나는 종업원을 고용할 만큼 사업장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종업원 문제는 없었는데 다른 세금 문제에서는 정직하지 못했다. 탈세를 하지 않고는 장사를 할 수 없다면 장사를 하지 않는 것이 정답이었다. 작년 초 그때 장사를 아예 시작하지 말고 다른 길을 찾았어야 했는데 그때는 발등에 불이 떨어진 심정으로 아주 절박했다.
아베샤네다에 처음 발을 들인 것은 십여년 전이다. 그 당시 한국에서 보내오는 후원금이 있었는데 그것만으로는 생활이 어려웠다. 먹고사는 것은 해결되었지만 아이들 교육비가 문제였다. 사실 아르헨티나는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전액 무상 교육제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공교육의 수준이 너무 낮다. 특이하게도 초중고 공교육의 수준은 너무 낮고, 국립대학의 수준은 너무 높다. 공립 초중고를 졸업하고 대학을 가면 강의를 들을 수 없어서 중도 탈락한다는 것. 그래서 웬만한 가정의 자녀들은 유치원부터 고교 졸업까지 사립학교를 다닌다.
마침 그 때 조카가 자기 매장에 일손이 필요하니 도와달라고 했고, 제시한 급여가 정확하게 두 아이의 수업료였다.
그렇게 처음에는 감사함으로 시작했던 일이다.
다른 사람 밑에서 단순하게 열심히 일하고 월급 받아 생활하는 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일인지 크든 작든 사업을 해보면 안다.
지난 십 수년을 돌아보면 소명을 가지고 아르헨티나까지 와서 정작 하나님 나라를 위한 고민보다는 먹고사는 문제가 더 컸던 것 같다. 이럴 거면 뭐하러 여기 왔나 싶다. 그러면서 스스로 위로하기는 이런 삶을 통해서 이 세상의 실체를 절감하지 않았냐 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쥐엄 열매를 먹는 돼지들의 세상임을 깨달았으면 그걸로 됐다.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성도라는 사람들조차 쥐엄 열매 쟁탈전을 벌이고 있는 현실을 보면서, 어떤 때는 크리스천들이 더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중 한 사람이 바로 나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믿음이 없으면 반드시 이런 비참한 탕자의 삶의 과정을 통과하게 하신다.
"이것이 바로 네 본래의 모습이란다. 어떤지 좀 보렴." 하신다.
2020년 갑자기 경험하게 된 코로나 19, 팬데믹은 이렇듯 앞뒤 분간 없이 무한 질주하던 나를 멈춰 세웠다. 세상 어느 것 하나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없다고 하는데 하물며 이 세계적인 감염병에 하나님의 뜻이 없겠는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만 나에게도 하나님께서 어떤 전환점을 주시는 것 같다. 이제 됐으니 그만 하라는 것이다. 필요는 아버지께서 채워주겠다 하신다. 세상 모든 염려를 멈추고 주님을 바라보라 하신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태복음 6장 33절)
거의 모든 경제 활동이 중단된 이 시국에도 어떤 이들은 온라인 판매로, 또 어떤 이들은 당국의 눈을 피해 가며 상당한 수입을 올리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온라인 판매를 시도해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3월 이후로 수입이 전무하다. 주님 주시는 것으로 생활하기보다 내 힘으로 더 많이 벌어보겠다고 떨치고 일어났던 고집을 꺾으시고 정말이지 철저히 내 무능함을 겪게 하신다. 세상의 늪에 빠져 앞뒤 분간 못하고 온갖 편법마저도 정당화하며 사는 데서 돌아서서, 은혜 입은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라 하신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시편 1편 1~2절)
2020년 6월 30일 화요일